1. 스물다섯쯤 돼 보이는 여자가 맹렬하게 유인물을 나눠준다. '광우병 감염경로'라는 제목의 표다. 시사IN 천관율기자라고 합니다. 어디서 나오셨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주위 아는 사람들끼리 나왔단다. 아니 그런데 뭐 이렇게 주최측스럽냐. 그럼 이 유인물은요? "그냥 제가 뽑아왔어요."
유인물 하단에는 '뭐시기 운동본부' 대신 ......3/cafe/2008/05/01/08/33/481901b10938c 어쩌고 하는 온라인 주소가 적혔다. 온라인에서 바로 인쇄 눌러서 자기집 프린터로 뽑은 모양이다.
"시민의 힘을 보여줘서 뿌듯해요. 정말 87년 이후 처음인 것 같아요!" 자원봉사를 하던 청년. 잔뜩 흥분해서 소리지른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앳되다. 실례지만 몇년생이신지? "87년생이요!"
2. 늦은 약속이 있던 어제, 집회 시작이라는 일곱시쯤 잠깐 둘러보고 분위기만 확인할 요량이었다. 온라인에서는 막강하기 이를데없던 '아이러브황우석'도 최전성기에 오프로 끌어낸 인원이 달랑 천단위였다. 그 정도의 조직력도 로열티도 없어봬는 MB탄핵카페가 어느 정도나 모아낼까 싶었다. DAUM의 탄핵서명은 60만을 향해가던 시점. 1%면 육천명. 그 절반잡고 삼천이면 성공이다 했다. 아주 속으로는 다시 그 반인 천오백이라도 대단한 거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저녁을 먹는데 문자가 한 통 왔다. "광화문 안가? 가봐야 속이 편할듯;" 은미다. 얘가 움직인다는 건, 진짜 바닥이 움직인단 얘기다(은미야 미안;;). 이것봐라? 기대치 상향조정. 이거 잘하면 신문에 날 정도 숫자는 모이겠는걸?
5월 2일 광화문
3. 어느 바보가 꼴랑 여기를 장소로 잡은 거야? 지나다닐 수가 없잖아.
이 위치면 동아일보 사옥에서 찍은 걸텐데, 정작 동아는 일면탑을 일면탑이라 부르지 못하니
약속시간이 다가오던 여덟시. 현장을 빠져나오는 데만 십분이 걸렸다. 그때쯤에는 광장을 채운 쪽수보다 주위로 삐져나간 숫자가 더 많아 보였다. 청계천 주변을 휘휘 감고 중간중간 다리마다 촛불로 디딜틈없다. 길 아래 청계천. 밤바람을 쐬는 이들 손에도 촛불이 여럿이다. 경찰추산 1만명이라니 한 2만쯤 봐주면 무리없겠다. 우리 각하의 대표 치적이신 청계천은 어제, 각하 그만 내려오시죠라고 외치는 이들의 놀이터였다.
헤드쿼터도 희한했다. 엠프도 없고, 멀티비전도 없고, 깃발은 분위기파악 못하는 참가자가 가져온 생뚱맞은 태극기 하나. 알량한 마이크 하나에 의존한 채 별달리 익숙해봬지도 않는 목소리로 운율 안맞는 구호들만 외쳐대는 폼이, 이 장사 해 본 양반이 아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뭐가 된다. 헤드쿼터만 빼고 모든 참가자가 왜 왔는지, 뭐하러 왔는지 알고 스스로 모여든 때문일게다. 이런걸 '집회2.0'이라고 불러도 되지 싶다.
이런 판이 있었던가? 내 경험엔 없다. 2002년 촛불집회, 2004년 탄핵집회 때도 '뭐시기어쩌고범국본'은 항상 있었다. 2006년 FTA 반대집회는 내가 학생으로 나간 마지막 판이었는데, 그때 뜨겁게 바닥을 차고오르는 열기와 전혀 동떨어진 '프로페셔널 집회'(뛰고 뚫고 넘고 밀고 밀리고 물대포를 맞는 뭐 그런)를 해버리는 통에 뒷풀이에서 헤드쿼터를 갈궈댔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원했던게 이런 판이었을까? 모르겠다. 아무튼 어제는 퍽 신선했다.
4. 내일 중으로 탄핵서명은 100만을 찍을거 같다. 지금은 이기고 있지만, 이 싸움은 아마도 지는 싸움이 될 테다. 온라인의 광우병신경증은 꽤 위태롭다. 이를테면 "수돗물이나 젤라틴으로도 광우병이 걸릴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은 아닐지라도 '꽤 과장'이다(다음주에 나갈 내 기사가 이런 '과장'에 한 수 보태지 않을까 어제오늘 전전긍긍이다). '걸릴 수 없다'는 걸 과학적으로 증명한 바가 아직 없다뿐인, 그런 정도 수준이다. 위험은 하다. 인류는 이 병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 그래서 정부의 쇠고기협상은 세기의 얼간이협상이다. 하지만 10년후에 전국민의 90%가 광우병에 걸리는 건, 아마 아닐 거다. 그 비슷하게도 아닐 거다.
MB탄핵이라는 절절하고도 시의적절한 요구가 하필 이런 '패닉'을 딛고 터져나왔다는 건 비극이다. 대운하도 아니고 건강보험도 아니다. 너무 허약한 지반 위에, 너무 많은 이들이 올라섰다. 황우석과 심형래가 보여줬듯, 최전선에 섰던 이들은 패닉이 가라앉은 후 바보취급을 피할 수 없다. 역풍이 불거다. 지금처럼 간다면 아주 세게 불 것 같다. MB를 끌어내려야 할 99가지 합리적이고 삶과 맞닿은 이유들은, 광우병 패닉과 동급의 멍청한 판단 취급을 당하며 쓸려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한동안 기회는 없다. 내가 지금 무서운 건 미국소가 아니라 이거다.
"100% 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0% 사망합니다. 100% 되돌릴 수 없습니다!!" 현장에서 받았던 유인물의 문구다. 인류가 거의 아는 게 없는 병을 두고 근거없는 확신에 차서 검역주권을 내던졌다는 것까지는 팩트고, 그걸로도 충분히 분노할 만하다. 하지만 이게 무신 히틀러식 유대인말살계획의 MB판 쯤으로 이야기해 버리면, 역풍이 불 때 견딜 수가 없다. 지금 숨죽이고 있는 이들은 "좌빨들이 그렇지. 근거없는 선동질로 공포분위기나 조성하는 것들."이라며 혀를 찰 테고(조중동은 이미 그러고 있다. 이게 다급한 불끄기 같은 게 아니라, 이친구들이 판을 더 크게 보는 건지도 모른다), 졸지에 건보민영화 반대와 대운하 반대와 안전한 먹거리 요구가 도매금으로 '선동질'이 되버릴 거다.
내 정서가 20세기스러워서 그런지, 이럴때 헤드쿼터의 역할이 중요하단 생각은 떨치기가 힘들다. 미친소 먹으면 다 죽는단 이야기가 당장은 가장 잘 먹히겠지만 거기에 안주하면 이 싸움 진다. MB가 우리네 삶을 어떻게 갉아먹고 있는지 폭넓게 치고나가는 것으로 전선을 넓혀야 한다. 팩트만 갖고 해도 된다. 우리 각하께서 하사하신 근거만으로도 무궁무진하니까.
지금의 광우병패닉을 '큰 전선의 지엽적 문제'정도로 줄잡지 않으면 역풍을 견딜 방법은 없다. 그런데 어제의 그 어리버리 헤드쿼터가? 모르지 또. 현장에서 쑥 크는 사람도 많으니. 아니면 온라인이 정말로 '다중지성'이라서 판을 정확히 읽고 패닉을 뛰어넘을지. 내가 쓰고도 좀 과한 기대같기는 하다만.
5. 어제의 '대첩'을 내 눈으로 보고서도, MB가 초조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우리 각하가 대중의 대규모 저항에 부딪혀본 '원체험'이 또 하필이면 서울시 버스시스템 개편이다. 2004년 7월 1일, 40분을 기다렸다며 성질내는 아주머니들과 중앙차로라는 신기한 놈에 당황해 잔뜩 꼬여버린 차량들. MB의 정치생명은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우매한 대중들의 성급한 반발을 뚝심과 소신으로 이겨내고 위대한 성취'를 한다는 MB어천가의 핵심이 저 버스시스템 개편이다. "MB가 뭔가 생각이 있겠지"라는 이들의 노예근성은 이때의 학습효과도 한몫 한다.
이번에도, 라고 각하는 생각하실 거 같다. 마침 치고들어갈 빈틈도 보인다. 이번 싸움에 지면, 버스시스템 개편과 한데 묶여서 '우매한 대중과 소신의 MB'라는 어처구니없는 프레임이 공고해진다. 이생각만 하면 어제의 흥분이 싹 달아나고 그저 아찔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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